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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경 “읽기”

- 리꾀르의 텍스트 이론으로본 법장보살 이야기

 

 

양신혜

 

 

 

Ⅰ. 들어가는 말

Ⅱ. 리꾀르의 텍스트 이론

Ⅲ. <무량수경>의 구조

Ⅳ. 법장보살 이야기 분석

Ⅴ. 본원 성취의 세계

Ⅵ. <무량수경>이 드러내는 텍스트의 세계

 

 

 

Ⅰ. 들어가는

 

1. 문제 제기

일반적으로 현대 사회의 정신적인 특징을 이념적 다원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이념체계에 의해 주도되어 온 전통사회와는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사상체계와 가치관들이 공존하면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선택을 강요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현대사회에서는 끊임없는 문화접촉과 홍수처럼 쏟아지는 타문화와 종교, 사상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로 더 이상 폐쇄된 사회와 획일화된 사고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의 종교 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는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도교, 무교, 민속신앙 등 다양한 종교적 흐름이 존재하며 한국인들이 이러한 종교들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해 왔으며 그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다져왔다.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한국에서 한 종교의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종교적 다원성을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종교의 경전을 읽는 행위는 종교 다원성을 하나의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전제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종교 다원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경전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즉, 그 종교의 독특성을 살리면서 경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가? 본 논문은 종교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한 방법으로 “종교의 경전을 읽는 과정”에 대한 성찰과 예를 제시하고자 한다. 경전은 종교인들의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고백한 글로 단지 자신의 체험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을 넘어 종교인들의 삶을 규정하는 역할을 하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경전은 신앙인의 삶을 묶는 결정체로서 신앙인의 삶을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이러한 경전을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대화의 대상인 종교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논문의 방법과 범위

종교간의 이해를 위한 하나의 단계로 본 논문은 “종교의 경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대승 불교의 한 흐름인 정토 신앙의 중심 경전인 <무량수경>을 텍스트로 삼아 리꾀르의 텍스트 해석이론을 토대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리꾀르의 텍스트 이론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우선, 그의 경전에 대한 독특한 이해 때문이다. 리꾀르는 경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 종교의 경전은 신자에게 일어난 절대적 사건의 체험을 여러 문학 양식을 통해서 기록한 책이다. 신앙인은 자신이 체험한 신앙을 적절히 표현하기 위해서 알맞은 문학양식을 선택하고 그 문학양식이 가지고 있는 언어규칙을 따라서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다양한 문학양식을 통해서 기록된 신앙고백은 객관적 진리일 수 없으며 그것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경전을 읽는 독자는 우선, 대상이 들려주는 의미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둘째로 그의 텍스트 이론이 지닌 독특성 때문이다. 그의 텍스트 이론은 “거리두기”를 전제로 하면서 “텍스트의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방법론이다. 여기에서 거리두기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텍스트 자체가 저자의 의도로부터 독립되어 그 자체로 독자의 객관적인 읽기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는 우선, 저자의 의도로부터 떨어져 자유로운 의미를 형성하기 때문에 저자와 거리를 둘 뿐만 아니라 독자와도 거리를 둔다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독자는 텍스트의 상황, 즉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텍스트를 독립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텍스트 이해는 저자를 모르는 경전을 이해하고자 할 때 유용하다.

그리고 리꾀르의 텍스트 이론은 텍스트 자체의 구조 분석을 넘어서 텍스트가 지시하는 세계, 즉 “텍스트의 세계”에 자신을 던져 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신이 걸어갈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실존적인 결단으로까지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텍스트가 드러내는 “텍스트의 세계”에 자신을 던져 겸손하게 텍스트가 들려주는 메시지를 듣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전제로 하면서 텍스트의 자율적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해석의 과정으로 삼은 리꾀르의 텍스트 이론은 경전을 읽는 독자에게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 줄 것이다.

이러한 리꾀르의 텍스트 이론을 토대로 불교의 경전인 <무량수경>을 읽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제외할 것이다. 우선 텍스트의 구조를 분석한다는 것은 텍스트의 폐쇄된 공간으로 들어가 텍스트 자체의 구조를 분석한다는 의미로, 역사적으로 정토교 논사들이 <무량수경>을 해석해 온 해석학적 역사를 일단 도외시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무량수경>이 지시하는 텍스트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독자 자신의 지평, 즉 현존재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은 유보하기로 한다. 단지 본 논문에서는 자신의 선이해를 떠나 <무량수경>을 구조 분석을 통해서 중심이야기인 법장보살 이야기를 드러내고 리꾀르의 신화 이론을 토대로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메시지를 듣고 그 의미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지 고찰해 보는 데서 만족하고자 한다.

 

Ⅱ. 리꾀르의 텍스트 이론

 

1. 텍스트의 정의

리꾀르는 텍스트를 “글로 쓰여진 모든 담론”이라고 정의했다. 구조주의학자인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가 언어를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분하였는데, 그의 구분법에 따르면 리꾀르가 말하는 담론은 랑그보다는 빠롤에, 낱말보다는 문장에 의미를 둔다. 그러므로 리꾀르의 담론은 소쉬르의 기호론 보다는 벰베니스트(Beneveniste, 1902-1976)의 의미론에 관심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리꾀르는 벰베니스트의 영향으로 담론을 일정한 시간 안에서 명제를 진술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문장의 의미를 강조하는 담론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성격을 지닌다. 첫째, 담론은 시간적으로 존재하며 지금 현재 실현된 사건(temporally and in the present)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언어체계가 시간의 흐름 밖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과는 다르다. 둘째, 기호(signs)로서의 언어(language)는 주체가 문제되지 않으나 담론은 누군가에게 말하는 사건(event)으로서 주체(Who speaks?)와 관련이 있다. 셋째, 언어체계내의 언어는 체계내의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에 의해서 의미를 지니나, 담론은 세계를 지시함(refers to world)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넷째, 언어체계는 의사소통을 전제로 하나,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없다. 하지만 담론은 사건으로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있어 대화가 이루어지며 메시지가 교환된다.

이러한 담론이 글로 쓰여질 때 사건으로부터 의미가 분리되어 글로 고정된다. 사건과 분리된 의미는 일정한 형식을 통해 텍스트에 담겨 객관화되고 외면화된다. 다시 말해 담론은 일시적이고 사라져 버리는 사건이지만 담론이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은 명제의 내용으로 사건의 의미와 같은 의미를 유지하며 글쓰기에 의해 텍스트에 고정(fixiation)되어 남게된다. 그러므로 텍스트는 쓰는 행위에 의해서 고정된 말이 된다.

쓰는 행위에 의해서 고정된 의미는 우선, 글을 쓰는 저자의 의도로부터 거리를 두게된다(distanciation). 그러므로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은 텍스트 해석을 통해 저자의 의도나 뜻을 이해하는 시도에는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텍스트와 텍스트를 창조한 저자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텍스트가 창조된 맥락, 즉 사회적, 역사적 정황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리꾀르는 텍스트가 창조된 상황에 따라서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의 맥락에 따라서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리꾀르는 텍스트가 저자의 주관적인 의도와 객관적인 의미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저자의 상황이나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지 않고서도 쓰여진 텍스트를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로써 텍스트는 담론의 말하기와 응답하기의 관계에서 쓰기(writing) - 읽기(reading)의 관계로 변하게 된다. 텍스트의 쓰기와 읽기의 관계는 더 이상 말하기와 응답하기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쓰기-읽기의 관계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 특징을 담론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담론의 상황인 말하기-응답하기의 관계에서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으나, 텍스트의 쓰기와 읽기의 관계에서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수도 없으므로 저자와 독자가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쓰기와 읽기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텍스트를 읽는 독자는 글을 쓰는 저자의 영역이 제외된 상황에서 글을 읽게 되며 저자도 독자가 없는 상황에서 글을 쓰게 된다. 저자와 분리된 상황에서 독자는 텍스트 앞에서 텍스트 자체가 던져주는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2. 구조적 설명

독자가 텍스트를 읽을 때 독자는 우선, 저자가 없는 상황에서 텍스트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리꾀르는 텍스트 자체의 내적 구조의 관계를 통해서 저자의 의도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텍스트 자체의 구조분석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리꾀르는 ‘구조적 설명’이라고 정의하였다. 다시 말해 독자가 텍스트를 읽을 때 우선 텍스트의 폐쇄된 공간으로 들어가 있게 되며, 시간적으로도 단절된 시간을 체험하게 된다. 이 폐쇄된 공간에서 독자는 텍스트가 들려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여기에서 텍스트는 객관적인 대상물에서 벗어나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공간적, 시간적 단절은 텍스트를 읽을 때 텍스트 자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는 텍스트의 일차적 의미를 구조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딜타이가 ‘설명’을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국한시킨 것과는 달리 리꾀르는 ‘설명’을 정신과학의 방법으로 수용한다. 리꾀르가 정신과학에서 사용한 설명은 빠롤보다는 랑그의 차원, 즉 기호의 체계(system of signs)에 속한다. 랑그의 차원인 기호들의 결합 체계(system of units), 즉 음운론적 조합(phonological articulation), 어휘의 조합(lexical articulation)들은 각 단위들이 다른 단위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차이에 의해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대립 결합(oppositive units)들이다. 문장도 여러 어휘의 결합으로, 한 어휘의 의미는 다른 어휘와 결합함으로써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렇게 어휘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지니게 되는 문장은 다른 문장과 결합하여 좀더 큰 구조를 만들어 의미를 드러내며, 문장의 결합을 통해서 나타난 큰 구조, 즉 문단은 다른 문단과 결합하여 더 큰 구조를 형성하여 의미를 드러낸다. 이러한 구조의 결합을 통해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언어의 구조인식이다. 그래서 텍스트의 ‘구조적 설명’이란 텍스트를 구성하는 각 구조의 결합을 분절한 후 분절된 구조의 결합을 통해서 의미를 드러내는 것으로, 텍스트를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태도이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기본구조는 주어와 동사로 이루어진 문장에서 시작한다. 주어는 행위 주체를 의미하며 동사는 행위자의 행동을 뜻하며 문장 뿐만 아니라 문단, 이야기 전체에 의미를 제공한다. 행위자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행위 그 자체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책을 주셨다”라는 문장에서 행위자의 위계(hierarchy of actants)-주는 사람(아버지)과 받는 사람(아들)-는 행위의 위계(hierarchy of actions)-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와 상호 연관이 있다.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은 얽히고 섥힌 행위가 지닌 일련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일련의 구조들의 결합을 통해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텍스트의 구조분석이 해야 할 일이다.

리꾀르는 의미체계의 현상태에서 출발하여 그 역사적 기원이나 발전과정에 의존하지 않고 그 의미체계의 기본구조를 찾아서 텍스트의 의미를 제공한다. 구조의 상호관계의 법칙을 찾아 그 의미체계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리꾀르의 텍스트의 구조분석이다. 텍스트의 구조분석은 두 단계로 나뉘어진다. 우선, 주어진 의미체계에서 의미체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기본구조를 알아내는 분해작업이다. 리꾀르는 이 분해작업을 수평적 작업(horizontal aspect)이라고 한다. 둘째 단계는 분해작업을 통해 찾아낸 기본구조들을 재구성하여 기본 구조들의 구성법칙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계적 작업(hierarchical aspect)이라고 한다. 이 위계적 작업은 일정한 형식이 나타내는 의미체계를 밝히는 작업이 된다. 텍스트는 문장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며, 문장과 텍스트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는 텍스트 전체구조를 통해서 나타내는 주요 주제와 문장과 문단을 통해서 나타나는 부차적 주제 사이의 계층화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부차적 주제는 전체적 주제에 통합되어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며 전체적 주제는 텍스트의 한 부분인 문장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구조적 분석의 과제는 우선, 이러한 전체와 부분을 단절시키는 데 있다. 전체와 부분을 단절시키는 이유는 바로 전체가 작은 구조의 결합을 통해서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단절은 독자가 텍스트를 읽을 때 독자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시간을 벗어나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가는 ‘탈시간화’(dechronologising)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이 탈시간화된 상황에서 텍스트의 구조를 분해하여 기본구조를 드러내며 그 기본구조들을 재구성하여 전체적 주제를 드러내는 과정을 수행한다.

3. 새로운 해석

텍스트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텍스트의 일차적 의미가 나타나며, 이 일차적 의미를 토대로 하여 “텍스트의 세계”가 독자 앞에 펼쳐진다. 이 “텍스트의 세계”와 독자가 살아있는 대화(living communication)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해석’이 시작된다. 텍스트와 살아있는 대화를 한다는 것은 독자가 텍스트의 세계에 자신을 던져 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보다 더 자신을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리꾀르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 생기는 ‘거리두기’에 근거한 구조적 설명과 ‘텍스트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과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해석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리꾀르에게 있어서 해석은 구조적 설명으로 나타난 일차적 의미를 토대로 하여 나타난 “텍스트의 세계”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현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세계와 현존재의 자기 이해의 관계는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ein einziger dialekische Prozess)이다. 우선, 텍스트를 읽을 때 독자는 두 개의 세계가 겹쳐지는 것을 체험한다. 그것은 텍스트가 드러내는 세계와 독자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로, 두 세계는 독자가 책을 읽을 때 동시에 독자 앞에 펼쳐지게 된다. 이 두 세계 사이에서 독자는 구조 분석을 통해서 드러난 일차적 의미를 토대로 한 텍스트의 세계가 지닌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독자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리꾀르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해석(interpretation)이 생기며 그 해석은 텍스트가 펼치는 의미의 세계에 자신을 던져 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텍스트의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하기(appropriation)’는 시간적으로는 “현재”(now), 공간적으로는 “여기”(here)에서 이루어진다. 텍스트를 접하는 독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텍스트의 세계”가 지닌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해석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해석은 지금, 현재 텍스트 앞에 선 독자가 텍스트의 구조적 의미가 지시하는 텍스트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해석은 또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 된다.

이처럼 ‘자기 것으로 하기’는 시간적으로 “현재”(now), 공간적으로 “여기”(here)를 강조하기 때문에 텍스트의 의미를 ‘자기 것으로 하기’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게 된다. 텍스트가 지시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목적 중의 하나는 문화적 간격을 극복하는 것으로 시간적 간격의 낯설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탈시간화’된 공간 속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자기 것으로 하게 된다. 둘째로 텍스트의 언어가 가지는 생소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즉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가치체계에서 생기는 낯설음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 노력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세계는 해석자 자신의 것으로 융해되어 체현된다.

텍스트가 드러내는 세계에 자신을 던져 그 의미를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텍스트의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서 해석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 해석의 정점에서 해석의 주체인 독자가 전면으로 부각된다. 하지만 주체인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자가 아니라 텍스트가 드러내는 의미 안에서 결단을 내리는 자로서, 독자의 결단은 텍스트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리꾀르는 텍스트의 내적 구조를 분석을 토대로 나타나는 텍스트의 세계에 독자 자신을 과감히 던져 텍스트의 세계가 지시하는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해의 과정을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명명하였으며 그 과정이 바로 “해석”이다.

 

Ⅲ. <무량수경(無量壽經)>의 구조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의 구조를 분석하기 전에 먼저, 이 경전이 정토교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 경전은 전기 대승경전으로,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을 설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량수(無量壽)라는 말은 Amitayus를 번역한 말로 “무량한 수명”이란 뜻이고, 이 경전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과 더불어 정토교의 소의 경전으로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이라고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은 초기 대승불교의 경전으로 인도에서 성립되었으며 중국으로 건너와 수․당 이전에 이미 정토교의 주요 경전으로 불교신자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정토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선도(善導, 613~681)가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을 한 마음으로 정성껏 읽는 것(독송정행;讀誦正行)을 정토 왕생의 수행법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아 <무량수경>은 <관무량수경>, <아미타경>과 더불어 중국 정토교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토교의 소의 경전으로 중시되는 <무량수경>은 중국에서 12번 번역이 이루어졌으나 지금 현재 5종의 번역본이 남아 있고, 7종의 본은 소실된 상태이다. 현존하는 경전 중 우리가 텍스트로 삼은 경전은 강승개가 번역한 것으로 강승개는 강거국(康居國) 출신으로 낙양의 백마사에 머물면서 이 경전을 번역(252)하였다. 이 경전은 정토교 신자들이 많이 읽고 있는 경전이자 불교학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 경전이다.

 

1. <무량수경>의 구조

리꾀르는 텍스트의 구조를 두 단계, 즉 수평적 작업과 위계적 작업을 통해서 구조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 단계로 <무량수경> 전체를 정토교 논사들이 전통적으로 분석한 6부분을 기본으로 한다. 정토교 논사들은 일반적으로 <무량수경> 전체를 셋으로 구분한다. <무량수경> 전체를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구분한 후 서분을 다시 두 부분, 즉 증신서(證信序)와 발기서(發起序)로 나누고, 정종분을 세 부분, 즉 소행(所行), 소성(所成), 소섭(所攝)으로 구분하여 모두 6부분이 된다. 이러한 구조 분석을 통해서 드러나는 중심 이야기는 법장보살 이야기이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전통적인 구조 분석, 즉 <무량수경>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을 토대로 하면서도 두 보살 이야기, 즉 대승보살 이야기와 법장보살 이야기를 중심으로 나누고자 한다. 왜냐하면 두 보살 이야기 모두 보살의 성불과정을 이야기 형식을 빌어 서술하고 있으며, 법장보살 이야기는 대승 보살 이야기와 비교할 때 그 의미와 법장보살 이야기가 지니는 독특성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장보살 이야기를 설하게 된 계기를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무량수경>의 중심 내용인 법장보살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독립된 부분으로 취급하여 정종분에 삽입한다. 법장보살 이야기를 설하게 된 계기와 법장보살 이야기, 본원 성취의 세계는 법장보살의 성불과정과 결과를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묶을 수 있다. 중생의 현실 세계는 법장보살 이야기와 중생의 관계를 설명한 부분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기로 한다. 본 논문에서 설정한 <무량수경>의 기본 구조의 내용을 전통적인 구조 분석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무량수경>의 전체 구조 비교

정토교 논사들의 구조 분석

본 논문의 구조 분석

서 분

증신서:경의 권위

<무량수경>의 권위

서 론

발기서:경의 배경

(장소, 때, 청중)

<무량수경> 설법의 배경

대승 보살 이야기

법장보살 이야기를 설하게 된 계기

본 론

정종분

소행:법장보살의 출가, 수행, 48원

법장보살 이야기

소성:성불과 정토의 장엄

본원 성취의 세계

소섭:중생왕생과 중생의 현실

중생의 현실 세계

유통분

<무량수경>의 힘

<무량수경>의 힘

결 론

3. <무량수경(無量壽經)>의 구조 분석

<무량수경(無量壽經)>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선언(宣言)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 아난존자가 불타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시작한다(如是我聞).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바로 이 한 구절에 내포된 두 관계이다. 첫 번째 관계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발신자인 불타와 수신자인 아난존자이며 경전의 내용은 “역사적 인물”인 불타가 깨달은(覺) 무엇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두 번째 관계는 불타의 설법을 들은 아난존자와 불교 신자의 관계로, 이 관계에서 부각되는 점은 아난존자의 절대적 체험을 표현하는 “증언”(證言)이라는 문학 유형이다. 리꾀르는 “증언”이라는 문학 유형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증언”은 역사의 우연한 시점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체험한 자가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는 진술 형태로,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는 행위를 통해서 그 체험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만큼은 절대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3.1 대승 보살 이야기

※ 대승 보살 이야기 내용 분석

신화적 서술물

대승 보살의 이야기

내용

지상의 삶

깨달음의 삶

서술 순서

수직적 하강

(천상의 존재의 하강)

지상의 삶

보살의 출가

수행

공덕성취

중생 인도

불타의 설법을 듣는 청중(수신자)은 31명의 존자(尊者)와 18명의 보살(菩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이 바로 불타의 설법을 듣는 수신자들이다. 31명의 존자들은 교단을 대표하는 자들로 이 경전이 지니는 권위를 드러낸다. 그리고 18명의 보살들은 모두 보현보살의 덕을 좇아서 보살의 서원을 세우고 그 서원을 이루기 위해 고통스러운 수행을 하고, 그 수행을 통해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을 이루어 중생에게 그 방편을 베풀어서 중생이 불법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들 보살들은 일련의 전형적인 수행 과정을 통과한 후 성불하게 되는데, 그 일련의 과정은 석가모니 불타의 성불 과정을 모범으로 한다. 대승 보살 이야기에서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출가’이다. 출가는 보살의 세속적인 삶과 깨달음의 삶을 구별시키는 사건으로, 보살의 삶을 출가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으로 구분하여 이야기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대승 보살은 천상에 살고 있는 존재로, 지상에 살고 있는 어머니의 배를 빌어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난다. 이 태어남은 주인공인 보살의 첫 번째 이탈이자, 변용이다. 이는 육체적 태어남을 넘어선 영적인 태어남을 의미하며 속세에 살고 있는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을 미리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지상에서 살아가야 할 삶은 천상에서 이미 인정한 삶이며, 천상의 뜻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속세에 태어난 다른 중생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윤리적으로 존경을 받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출가 이후의 삶은 보살이 출가한 이유에 대한 해결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으려는 성불 과정을 의미한다. 보살은 중생들에게 윤리적 본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으나 인생의 무상함(四苦: 生, 老, 病, 死)을 깨닫고 출가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실존적 절망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출가”는 보살의 두 번째 이탈이자 변용이다. 속세에서의 이탈, 왕에서 수도승으로의 변용은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기 위한, 처음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정신적 차원의 위기를 의미한다.

보살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6년동안 수행을 쌓았으나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실패하지만 천상의 존재들의 도움(천인-나뭇가지, 새-보호, 길상동자-길상초)으로 깨달음을 완성한 각자(覺者)가 되어 보살 자신의 처음 상태를 회복한다. 이로써 보살이 이룩한 깨달음의 완성은 현실의 번뇌에 매여있는 중생들을 인도하는 토대를 구축한다.

보살은 자신이 성취한 공덕을 중생들에게 베풀어 그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보살의 자비는 중생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아파하는 자비(同體慈悲)에서 시작되며 이러한 보살의 모습은 인간의 세상을 떠난 영웅이 다시 되돌아와서 인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과 유사하다. 인간의 세계에 다시 돌아온 영웅처럼 보살은 자신이 성취한 초월적 힘으로 우주 도처에 나타나 중생구제의 활동을 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보살은 우주적 존재로서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대승 보살 이야기의 주인공인 보살의 삶은 하나의 원을 형성한다. 즉, 보살은 천상의 존재로 중생의 세계에 태어나 중생들을 위해서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다시 자신의 공덕으로 중생들과 깨달음의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중생의 세계와 보살의 세계를 연결한다. 이처럼 보살의 삶은 하나의 원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원형은 영웅신화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형태로 대승 보살 이야기도 일종의 영웅신화이다.

3.2 법장보살 이야기 분석

※ 법장보살 이야기 내용 분석

신화적 서술물

법장보살의 이야기

내용

중생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서술 순서

한 나라의 국왕인

법장보살

길잡이=세자재왕불

48원 고백

수행

성불(아미타불)=본원성취

법장보살 이야기의 내용을 설하기 전에 불타는 정광여래(錠光如來)로부터 시작하여 과거 54불의 명호(名號)를 열거하고 있다. 이 많은 불타 중 법장보살이 깨달음을 얻고자 출가를 하도록 인도한 불타는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로, 정광여래로부터 54번째 불타이다. 이 세자재왕불은 법장보살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출가를 결심하도록 인도한 불타로, 법장보살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준 길잡이이다. 그런데 경전의 중심 이야기인 법장보살 이야기를 바로 서술하지 않고 수많은 불타의 명호(名號)-54불의 이름-를 나열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많은 불타들이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의 세계에 태어나 성불하였으나 그 불타들은 고통 속에서 헤매는 범부인 중생들과는 직접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렇게 많은 보살들이 성불하여 불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이 생사의 세계에서 불타를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법장보살 이야기를 설법하고자 결심한 것이다.

 

1) 48원

세자재왕불의 설법을 듣고 출가한 법장보살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48원을 서원한다. 이 48원은 대승 보살이야기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으로 법장보살의 독특성이 드러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법장보살의 48원은 법장보살 이야기가 중생들에게 전하는 중심 메시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8원의 의미를 “중생의 입장”에서 원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48원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제자로서 불타가 되고자 서원한 원, 둘째 중생들의 성불을 위한 정토 건설을 밝힌 원, 셋째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 중생들이 수행해야 하는 조건을 밝힌 원으로 구분된다.

 

* 48원 구조 분석 비교표

정토교 논사의 48원 구조

본 논문의 48원 구조

섭법신원

12, 13, 17원

1. 구제자로서의 아미타불

12, 13, 17원

섭정토원

31, 32원

2. 정토의 세계

1~11,15,16,21,22,31,32,

34~39,41~45,47,48

섭중생원

1~11,14~16,18~30,33~48

3. 왕생의 길

18, 19, 20원

우선, 법장보살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스스로 구제자가 되고자 서원한다. 12원에서는 모든 불국토를 비출 수 있는 빛을 소유하기를 서원하였는데, 이는 백천억 나유타의 모든 불국토를 비출 수 있는 빛으로 “공간적 보편성”을 나타낸다. 13원에서는 무한한 수명을 갖고자 하는 법장보살의 소망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법장보살이 중생에게 베푼 자비가 시간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는 삼세의 모든 중생들이 성불하기를 바라는 법장보살의 자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17원에는 법장보살이 서원한 이름의 의미와 능력이 잘 나타난다. 법장보살은 자신이 성불하여 성취하게 될 이름을 모든 불타들이 찬양하기를 서원한다. 여기에서 모든 불타가 법장보살이 성취할 이름인 아미타불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에 내재되어 있는 구제 행위를 찬양한다는 뜻이다. 이는 법장보살이 성취한 이름이 모든 중생들을 정토로 인도하는 거룩한 이름이라는 사실과 우주적 이름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또한 이 이름을 찬양한 중생들에게 힘과 소망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하며 중생들을 정토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을 지닌다.

둘째, 법장보살의 구체적인 중생 구제 사역은 정토 건설이다. 이 정토는 중생들이 성불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으로, 이 곳에 태어난 중생들은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원은 11원으로, 이 원에서 법장보살은 반드시 중생들이 정토에 태어나 성불을 성취하는 정정취에 머물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 소망은 정토에 태어난 중생들이 성불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기를 바라는 원의 내용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법장보살의 서원은 단적으로 중생들이 정토에 태어나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얻어 반드시 성불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드러낸다.

정토에 태어난 중생들이 반드시 정정취에 머물게 되는 것은 정토에 있는 사물들의 역할 때문이다. 즉, 정토의 사물들은 중생들을 새로운 존재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31원을 보면 법장보살이 서원한 정토는 청정한 세계로 정토에 태어난 중생들은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정토의 사물들을 볼 수 있고 수많은 불타의 세계를 비출 수 있을 만큼 청청하여 이 곳에 태어난 중생들은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32원에서는 정토에 있는 모든 사물들, 즉 꽃과 나무, 물, 누각, 궁전 등이 백천 가지의 향기로 이루어져 그 향기가 시방 세계에까지 퍼지길 서원하였다. 이 원에서 향기는 시방 세계에 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꽃과 나무의 향기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꽃의 향기는 두루 퍼져서 꽃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정토에 있는 꽃과 나무의 향기가 중생들에게 퍼져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이처럼 정토에 있는 구체적인 사물들은 중생들을 성불로 인도한다.

셋째, 중생들이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수행을 서원한 원들은 중생의 입장에서 구원론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법장보살 이야기에서도 대승 보살이 정토 왕생의 길로 제시한 선한 공덕을 수행하고 그 공덕을 회향하는 자비의 행을 제시한다(19, 20원). 그렇지만 법장보살 이야기에서 새롭게 제시되는 정토 왕생의 길은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수행(念佛)과 법장보살이 성취할 이름을 듣는 수행을 제시한다. 우선, 18원에서 법장보살은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수행(念佛)을 서원한다. 여기에서 아미타불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의 형상이나 삶을 떠올려 회상한다는 의미이다. 이 회상의 과정을 통해서 중생들은 법장보살이 걸어간 중생 구제의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듣고 그 의미와 자신을 일치시켜 지금 현재의 삶을 결단한다. 이 18원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염불 수행의 조건이다. 이 원에는 염불 수행의 조건으로 진실된 마음과 즐거이 믿는 마음을 내세운다. 지극한 마음과 아미타불의 성취한 그 본원의 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강한 믿음 없이 아미타불의 생각하는 수행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20원을 보면 법장보살이 성취할 이름 즉 아미타불을 들을 때, 중생은 아미타불이 이룩한 정토를 생각하게 되고 정토에 태어나고 싶은 소망을 고백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법장보살이 성취할 이름을 듣고 그의 나라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성취한 능력 때문이며, 그의 이름을 듣는다는 것은 절대자 앞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발견한 자와 같은 겸손을 의미한다. 법장보살이 성취한 이름의 능력을 믿는 자만이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고 그의 생애를 생각하게 된다.

 

2) 보살수행과 성불

법장보살이 세자재왕불 앞에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48원을 고백하고 그의 굳은 의지를 시로 낭송하고 나자 하늘에게 꽃비가 내리고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고 성불할 것이라고 예언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법장보살이 반드시 수행을 완성하여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의 음성으로 천상의 존재들이 법장보살의 삶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량수경>에서 법장보살이 수행을 완성하는 과정은 천상 존재의 예언대로 어떤 전환이나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자신의 결단과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보살 수행의 어려운 과정에서 좌절하는 법장보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며 그의 수행 과정은 천인의 예언대로 순조로운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서 법장보살 이야기는 보살의 어려운 수행과정을 중생들에게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장보살 이야기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는 48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살 수행을 완성한 법장보살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지혜와 자비의 공덕으로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전형적인 보살의 삶”을 성취하고 성불하여 서쪽 나라에 계신다. 여기에 나타난 서쪽 나라는 십만억의 나라를 지난 곳에 있는 나라로 중생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중생의 세계를 초월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법장보살의 수행이 우주적 힘으로 승화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법장보살이라는 구체적인 인물-비록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이 우주적 차원으로 승화되어 우주 각방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구제활동을 하는 보편성을 지닌 보살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이처럼 법장보살은 오랜 수행으로 아미타불이 되었으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지금 현재도 중생들에게 불법을 들려주고 중생들을 제도한다.

 

3.3 대승 보살 이야기와 법장보살 이야기와의 관계

<무량수경>에서는 왜 대승 보살의 이야기와 법장보살의 이야기를 대비시켜 놓았을까? 서분에 기록된 대승 보살의 이야기와 법장보살의 이야기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선, 대승 보살의 이야기와 법장보살의 이야기의 대비는 두 이야기 사이에 “단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량수경>을 읽는 독자는 대승 보살의 이야기를 읽고 난 후 이 이야기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법장보살의 이야기가 지닌 독특성(=차별성)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법장보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독자는 법장보살의 이야기에 대승 보살의 삶과 목적이 그대로 흡수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법장보살은 계속되는 생사의 세계에서 이타적인 삶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이상적인 인간관을 실현하였다. 다시 말해서 법장보살의 수행에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삶이 나타나 있으며, 삶의 목표를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깨닫는 것으로 삼아서 보살의 수행인 육바라밀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법장보살은 자신의 공덕을 중생들에게 베풀어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다. 이러한 법장보살의 삶은 대승 보살 이야기에 나타난 우주적 보살들의 삶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법장보살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에 툭 튀어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대승 보살 이야기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법장보살의 이야기에 나타난 보살관은 대승 보살 이야기의 보살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법장보살의 이야기는 대승 보살 이야기와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불타가 법장보살의 이야기를 중생들에게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법장보살의 이야기만이 지니는 독특성은 무엇인가? 대승 보살의 이야기와 비교하여 법장보살의 이야기가 지닌 독특성은 우선, 그 주인공에 있다. 대승 보살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천상의 존재로, 이 이야기는 천상의 존재가 중생들을 위해서 생사의 세계에 태어나 자신의 소명을 완성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와 달리 법장보살 이야기의 주인공은 생사의 세계에 태어난 인물로 중생들과 같은 처지, 즉 윤회의 고통에 매여있는 중생이다. 중생과 같이 윤회의 고통에 매여있는 법장보살이 어려운 수행의 과정을 완성한 법장보살 이야기는 중생들에게 하나의 희망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서 중생들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법장보살이 수행을 성취한 것처럼 자신도 성불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되며 수행의 길에 들어설 용기를 얻게된다.

법장보살의 이야기가 지닌 두 번째 독특성은 수행 과정에 있다. 법장보살의 이야기에 나타난 보살의 수행에는 수행을 방해하는 마왕이나 그를 돕는 협력자가 나타나지 않고 법장보살 자신이 스스로 끊임없이 수행하는 순탄한 과정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와 달리 대승 보살의 이야기에서는 보살 수행의 좌절과 극복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선, 보살 수행을 완성하기 전에 6년간 수행을 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좌절한다. 이것은 보살 수행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6년간의 보살 수행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력자-천인, 새, 길상동자-가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초월적 힘의 상징이며 보살은 이 초월적 힘에 의지하여 자신의 길을 완성한다.

이렇게 대승 보살의 이야기에서 자세하게 서술된 드라마틱한 보살 수행의 과정이 법장보살의 이야기에서는 극적 전환이 없이 평이하게 서술된 이유가 무엇일까? 대승 보살의 이야기와 달리 법장보살의 이야기에 나타난 법장보살의 수행은 천상의 존재와 세재자왕불의 예언에 따라 극적 전환을 거치지 않고 평이하게 이루어져 간다. 그렇다고 법장보살의 수행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대승 보살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법장보살의 이야기에 나타난 법장보살의 수행은 실패의 과정을 나타내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법장보살의 이야기의 초점은 법장보살의 힘든 수행 과정에 있지 않고 48원 성취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법장보살의 이야기가 지닌 세 번째 독특성은 법장보살의 48원에 있다. 법장보살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자신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세분화하여 48가지로 나타내고 있으나 대승 보살의 이야기에서는 중생을 위한 원을 세우지 않고 있다. 이 차이점을 통해서 법장보살의 이야기가 지닌 특징은 48원 고백과 그 성취, 즉 본원력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법장보살이 세운 48원의 특징은 정토 건설과 염불 수행법에 있다. 우선, 법장보살이 세운 정토는 성불하기를 원하는 중생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으로, 이 곳에서 중생들은 저절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런데 대승 보살 이야기의 보살은 자신이 스스로 성취한 공덕으로 시방 세계, 즉 번뇌의 세상에 살고 있는 중생들을 직접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여기에 큰 차이점이 있다. 법장보살은 중생들이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불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보살들이 스스로 성취한 공덕의 힘으로 중생들을 인도할지라도 어려운 보살 수행을 참고 견뎌내지 못하는 중생들이 많기 때문에 중생들이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정토에 태어난 자들은 정토의 사물에서 나오는 빛과 음악 소리, 향기 등을 통해서 반드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 법장보살은 중생들이 해야하는 수행법으로 쉬운 염불 수행을 성취하였다. 대승 보살 이야기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제시된 어려운 보살 수행을 제시하고 있지만 법장보살 이야기에서는 아미타불 이름을 듣고 그 이름의 능력을 믿는 마음에 근거한 염불 수행을 정토왕생의 행으로 제시한다. 아미타불을 믿는 마음으로 그가 성취한 이름을 듣고 염불을 한다면 중생은 그것만으로도 정토에 태어날 수 있게 되며 그 곳에서 성불하게 된다. 그러므로 법장보살의 이야기의 주제는 대승 보살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중생구제”이나 법장보살의 이야기만이 전하는 독특한 메시지는 바로 본원 성취에 있으며 본원 성취의 구체적 내용은 정토 건설과 염불 수행으로 나타난다.

 

3.4 중생의 현실 세계 - 죄로 가득한 범부 - 삼독오악(三毒五惡)의 범부

<무량수경>에서는 중생의 현실 세계를 삼독오악으로 서술하고 있다. 우선, ‘삼독’은 인간의 욕망(탐욕; 貪慾)과 허물(진에; 瞋恚)과 무지(우치; 愚痴)를 의미한다. 욕망은 탐욕의 고통으로 중생들이 헛된 욕심에 싸여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며 근심하는 것을 뜻한다. 성냄의 허물은 중생들이 부모와 자식, 형제, 부부, 가족들 간에 서로 공경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서로 미워하고 시기만하고 서로 돕지 않고 다투기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지는 어리석음의 고통으로 진리를 믿지 않고 그릇된 가르침에 빠져있는 것을 나타낸다. 이 무지 때문에 중생들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 본성, 즉 무명을 지닌 채 태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참된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윤회의 고통에서 헤매고 있는 자로, 중생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태어남 자체가 바로 죄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삼독’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진리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자라는 사실을 의미하며 인간의 태어남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오악’은 중생들이 사회생활, 공동생활을 하면서 짓게되는 죄로, 인간이 ‘선택’한 ‘악한 의지의 결과’이다. 오악에는 우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죽이는 살인 행위(살인; 殺人), 둘째 재물 모으는 일만을 즐거움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죄(투도; 偸盜), 셋째 자신의 정욕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가족을 파괴하는 죄(음행; 淫行), 넷째 거짓말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죄(망어; 妄語), 다섯째 술에 취해서 가족들을 돌보지 않고 나쁜 행동을 하는 죄(음주; 飮酒)가 있다. 이처럼 <무량수경>에서는 인간의 죄성과 구체적 죄를 삼독오악을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Ⅶ. <무량수경>이 드러내는 “텍스트의 세계”

 

<무량수경>의 각 부분은 법장보살 이야기의 의미를 이루는 토대가 되어 하나의 전체적인 주제, 즉 “중생 구제”의 객관적 사건이 주는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법장보살 이야기는 한 구체적 인물인 법장보살의 중생 구제의 삶, 즉 법장보살이 서원한 48원의 성취를 증거한다. 하지만 <무량수경>에서 법장보살 이야기는 신화적 언어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매우 곤혹스럽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과학적 합리성의 영향을 받아 신화가 던져주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더이상 현대인들은 신화의 시간을 실제 역사의 시간과 연결하지 않으며 신화에 나오는 어떤 장소도 현재의 공간 속으로 연결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 신화는 허구의 세계일 뿐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신화가 들려주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리꾀르는 우선, “비판적 방법”(critical method)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때 해석자인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원초적인 신비를 존중하는 자세 신화가 스스로 의미를 드러내도록 하는 자세이다. 이러한 자세에서 신화는 새로움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리꾀르는 비판적 방법을 통해서 새로움을 회복한다고 해도 신화가 드러내는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원시적 기호(primodial sign)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한다.

법장보살 이야기는 비록 신화이지만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법장보살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지 리꾀르가 악과 관련된 신화를 분석하여 제시한 신화의 기능을 통해서 그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우선, 리꾀르가 제시한 신화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시간을 대표하는 어느 특정 시간을 통해서 구체적인 사람이 보편인으로 나타난다. 이 보편성을 띤 구체적인 사람이 한 경험은 경험의 ‘원형’(archetype)이 되며 신화 속에서 이 보편인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둘째, 신화에 나오는 보편인은 어떤 방향을 향하여 움직인다. 죄의 시간의 처음과 나중을 말함으로써 신화는 인간 경험에 어떤 방향과 긴장을 준다. 신화의 중심인물이 하는 체험은 단순히 지금 현재만의 체험이 될 수 없다. 신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 체험하는 경험은 처음과 나중 사이, 창세와 종말이 교차하는 순간(instantaneous cross-section)이다. 이런 경험을 전하는 신화를 읽음으로써 독자는 인간의 상실과 구원이라고 하는 기본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셋째, 신화는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려고 한다. 죄로 얼룩진 현실과 순결한 피조물인 본래적 현실(fundamental reality) 사이의 불일치라는 수수께끼를 해결하려고 한다. 신화는 이야기를 통해 이 과정을 더듬는다. 이로써 신화는 인간의 존재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을 드러내게 된다.

리꾀르가 제시한 신화의 세 가지 기능, 즉 보편성과 방향성과 실존적 탐구를 토대로 하여 법장보살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는 우선, 리꾀르가 제시한 신화의 기능 중 “실존성”을 법장보살 이야기에 적용하여 이 이야기가 드러내는 의미부터 이해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법장보살 이야기 자체에는 법장보살의 실존적 고민과 갈등이 나타나지 않지만 이를 통해서 법장보살 이야기는 바로 죄에 매여 있는 중생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중생들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시된 이야기라는 사실을 <무량수경>에 있는 “삼독 오악”, 즉 중생의 현실 세계를 서술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한다.

 

1. 죄악 중생

“삼독 오악”, 즉 죄에 매여있는 중생의 모습을 서술하는 <무량수경>의 부분은 법장보살 이야기를 설하는 불타의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깨달음의 세계에서 소외된 중생에게 회복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중생 구제의 형태”를 선포하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무량수경>을 읽는 독자는 이 부분, 즉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죄성을 나타내는 ‘삼독’과 중생 스스로가 선택한 악한 의지의 결과인 ‘오악’을 자세하게 서술한 부분을 읽으면서 자신이 바로 이런 죄에 매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본질적인 죄성을 깨달은 독자는 자신 스스로 성불을 성취할 수 없는 유한한 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며 무한한 절대인 아미타불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리꾀르가 제시한 악의 개념 중 신 앞에서 자신의 유한함을 자각하는 죄는 <무량수경>에서 인간의 죄를 설명한 삼독오악 중 “삼독”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 절대자 앞에 선 인간의 유한함을 의미한다. 아미타불 앞에서 본질적인 죄성을 고백한 중생은 스스로 보살 수행을 완성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중생은 자기 밖에 있는 힘, 무한한 힘인 아미타불의 힘에 의존하게 된다. 즉, 중생이 자신의 죄성, 탐욕과 어리석음을 고백한 순간 중생은 겸손하게 불타의 목소리를 듣고자 무릎을 꿇게 된다. 이것이 중생 안에 내재된 역설로 리꾀르는 이를 죄의식이라고 명한다. 인간은 절대의 완전함과 극한 대립 관계에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의 희망을 품게 된다. 이것이 절대가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인 바로 법장보살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현실을 서술하고 있는 “삼독 오악”은 법장보살 이야기가 바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제시된 절대의 이야기이며 초월적인 힘을 지닌 우주적 존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법장보살 이야기는 불타의 세계와 중생계 사이에 놓여 있는 절대 간격을 극복할 수 있는 다리를 제시하는 “회복(=복원)의 이야기”이다.

 

2. 보살의 길

윤회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선포된 법장보살 이야기는 법장보살이 걸어간 중생 구제의 사역을 서술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구체적 인물이 걸어간 중생 구제의 사건이 이야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나타난 이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리꾀르는 다양한 가지각색의 신화들이 모두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화가 전하는 태초의 사건이 이야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는 원역사(fundamental history)의 처음과 종말을 포괄하는 의미의 잉여(surplus)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신화의 이야기는 구체적 시간의 한 지점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서술하고 있으나 인류의 처음과 끝을 포괄하는 의미 때문에 독자는 신화를 통해서 자신의 가야 할 방향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신화는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구체적인 사건을 서술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인류의 처음과 끝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의미를 불러 일으키며 독자는 신화를 통해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과 더불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법장보살 이야기는 새로운 중생 구제의 형태를 선포하는 이야기로 법장보살이 걸어간 성불의 길은 삼세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중생 구제의 의지를 포함하고 있다. 즉, 법장보살의 중생 구제의 구체적 사건은 전 인류를 포괄하는 사건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읽는 독자에게도 여전히 중생 구제의 의미를 던져 준다. 법장보살 이야기는 법장보살이라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인물이 중생들을 위해서 서원을 세우고 보살 수행을 거쳐 그 서원을 성취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건은 바로 중생들에게 성불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대승불교의 전형적인 보살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법장보살의 삶은 하나의 원형으로서 보편성을 띠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법장보살 이야기가 지닌 독특성, 다른 보살 이야기와 구별되는 차이에 집중해야 한다. 법장보살 이야기의 독특성은 48원으로, 48원은 법장보살 이야기만이 전하는 독특한 메시지이다. 그러면 48원이 성취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법장보살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48원이며 중생들이 성불을 성취하게 되는 것도 법장보살이 본원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이 본원의 힘에 의지해서 중생들은 정토에 다시 태어나 성불을 성취하게 된다. 즉, 본원의 힘은 깨달음의 장소인 정토까지 중생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며 정토는 불타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를 중재하는 곳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법장보살이라는 한 특정한 인물이 품었던 의지의 표현인 본원이 온 우주의 중생들이 응답하도록 되어 있는 보편적 실재로 절대적 힘을 지닌 진리로 승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법장보살의 본원은 구체적인 인물인 법장보살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그 본원에는 영원한 진리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이 본원에 나타난 영원한 진리를 믿음으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본원에 나타난 영원한 진리가 가지고 있는 초월적 작용이 보편적으로 아미타불을 믿는 모든 중생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본원은 영원한 실재이며 <모든 실재의 근저에> 있는 것이 된다.

이 본원의 힘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우선, 공간적으로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들과 시간적으로는 삼세에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법장보살이 성취한 본원력은 ‘보편성’을 지닌다. 둘째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은 중생의 지위나 권력에 제한을 받지 않고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나타나므로 법장보살의 본원력은 ‘무차별적’ 특성을 지닌다. 셋째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은 중생들을 구제하는 ‘절대적인 힘’이다. 다시 말해서 아미타불이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의지와 힘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우주적 힘’이며 법장보살이라는 구체적인 특정 인물을 통해서 본원이 성취되었으나 그 본원의 힘은 ‘보편적인 힘’으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의 성취’이다. 이처럼 법장보살이 성취한 본원력은 보편성, 무차별성, 절대성을 특징으로 삼는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본원의 힘은 중생들을 위한 자비에 근거한 절대적인 힘으로 중생들에게 다가가며 중생들은 이 절대적인 힘에 의지해서 자신의 성불을 이룬다.

법장보살이 지닌 중생 구제의 의지를 표현한 본원의 구체적인 내용은 정토에 태어난 중생들의 모습와 정토의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법장보살이 서원한 48원의 내용은 중생 구제의 장소인 정토 건설과 새롭게 태어난 중생의 모습으로 요약된다. 이처럼 법장보살은 중생들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중생 단계로 정토를 건설하였다. 법장보살이 건설하고자 한 정토는 무한한 절대의 세계인 불타의 세계와 윤회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중생의 세계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중재하는 곳이다. 즉, 무지의 고통을 안고 태어난 중생들이 생사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 중간 단계로 정토를 건설한 것이다.

하지만 법장보살이 건설한 정토를 <무량수경>에서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모습으로 서술하고 있다. 죄로 물든 중생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깨달음의 길에 들어선 중생들은 쉽게 좌절한다. 이러한 중생들에게 그 곳에 태어나기만 하면 성불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희망이다. 여기에서 중생에게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 스스로 정토에 다시 태어나 성불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정토는 중생에게 희망의 근거이며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3. 신앙의 응답

법장보살 이야기는 객관적인 구원 사역을 전하는 신화로 법장보살은 세자재왕불의 설법을 듣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을 깨닫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48원을 고백하고 어려운 보살 수행을 견뎌낸다.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법장보살이 걸어간 삶의 방향은 중생들에게 긴장을 부여한다. 중생은 법장보살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중생 구제의 사역과 죄로 물든 중생의 현실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큰 간격을 깨닫게 되며 이 간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된다. 즉, 법장보살이 성취한 본원의 힘에 의지하여 정토에 태어나 성불을 성취할 것을 믿고 그의 이름을 생각하는 염불 수행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역할은 바로 리꾀르가 제시한 “방향성”으로, 법장보살 이야기의 주인공인 법장보살이 걸어간 삶의 방향은 중생들에게 새로운 구제의 방편을 제시하여 새로운 삶의 결단을 요청한다. 이로써 법장보살의 삶과 신화를 읽는 중생의 삶은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단, 이 고리는 중생의 믿음에 근거하며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즉, 믿음 안에서 이 관계는 일치되며 신화의 삶은 중생의 삶 속에서 성취된다. 그렇다면 법장보살의 삶과 중생의 응답에 대한 구체적 실천으로 제시된 염불수행은 중생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우선, 법장보살이 성취한 이름은 법장보살의 소망의 성취, 즉 중생 구제의 목적을 성취했다는 증표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듣는다는 것은 법장보살의 서원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 일어나는 일로, 아미타불의 힘에 의지해서 성불을 성취하고자 하는 믿음의 결과이다.

그리고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염불 수행은 아미타불이 걸어간 삶을 “회상”하는 일이다. 중생은 법장보살이 걸어간 삶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아미타불이 성취한 자비와 지혜의 능력에 힘입어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게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염불 수행은 중생과 법장보살의 삶을 연합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 안에서 중생들은 자신의 처지와 성불의 가능성을 깨닫게 되고 정토에 태어나고자 보리심을 내게 된다. 이것이 염불 수행이 중생에게 끼치는 영향이다.

리꾀르가 제시한 신화의 기능인 “보편성,” “방향성,” “실존성”은 법장보살 이야기와 중생의 관계를 분명하게 나타내며 이 이야기가 중생에게 끼치는 영향도 분명하게 드러낸다. 우선, 중생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법장보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윤회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 성불을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 중생은 겸손하게 이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법장보살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법장보살 이야기가 건네는 말에 겸손하게 응답한다는 의미이다. 이 응답 속에서 중생은 새롭게 열려진 세계에서 자신이 걸어갈 길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게 된다. 이처럼 법장보살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중생 구제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으며 그 메시지를 겸손하게 들을 때 새로운 삶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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